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배경 (문단 편집) === 미국 여론에 대한 오판과 미국에 대한 과소평가 === 미국의 여론에 대한 오판 역시 전쟁을 결정하는 이유였다. 일본의 시각에선 미국은 당시 [[경제 대공황]]으로 경제의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미국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먼로 독트린]]과 맞물려 미국을 더욱 고립주의 성향으로 빠뜨렸고, 또한 [[유럽]]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원망어린 시선 역시 컸다. 미국인들의 인식은 당장 자신들이 겪고 있는 경제 대공황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유럽 동네 쌈박질에 괜시리 참견했다가 얻은 병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아직 그때의 무기랑 빚도 갚지 못한 주제에 그새를 못 참고 또 다시 [[제2차 세계대전|전쟁]]을 벌이는 유럽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때문에 유럽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상황에서도 미국 내 여론은 극소수 루즈벨트파를 제외하면 국민, 의회 모두 절대적으로 참전반대, 고립주의노선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가뜩이나 여러 전쟁을 겪고 호전적으로 변한 일본은 자기들이 선제공격을 해서 미 태평양 함대 주력을 섬멸해 기선을 제압한다면 저 자세로 협상해 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사항이 앞섰던 것이다. 미국의 경제 동원에는 몇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마저도 미국 내 고립주의 여론이 너무 절대적이었던지라 장기전으로 갈수록 여론에 발목이 잡혀 전력으로 전쟁에 임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상했고, 한편으론 미국 입장에서도 미국 내 반전 여론에 의해 대선을 의식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전쟁을 중도에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또한 미국과의 전쟁 무대는 [[태평양]]이라는 점이 중요한 요소였다. 미일간의 전쟁은 지상전으로 결정되는 유럽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 분명했다. 경제적 자급권이 형성되어 지속적 총력전이 가능한 초강대국의 싸움이 벌어질 텐데, 태평양이라는 [[바다]]가 무대인 만큼 한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도중에 외교적으로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군에 미국을 공격해 워싱턴까지 진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미국이 태평양을 건너 도쿄까지 진군해올 수 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또한 태평양에서 싸울려면 [[해군]]이 반드시 필요한데, 미 태평양 함대에 어떻게든 [[진주만 공습|기습]]을 가해 치명상을 안겨 잠시만이라도 해군력에 공백을 만들어버릴 수 있다면, 국력과는 무관하게 미국이 자신들에게 건너올 수단이 당분간은 없어지는 셈이니 그 사이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 일대와 [[미국령 필리핀]]을 점령해버리고 태평양의 주도권을 선점한 뒤 점령지의 방어선을 굳혀 방어전 위주로 버틴다면 미국이 뒤늦게 함대를 재보강해 반격을 펼치려고 한들 이미 필리핀을 포함해 대부분이 넘어가버린 전선에 경제 상황도 최악인 미국이 비용적, 정치적 부담 아래 협상을 통하여 [[동아시아]]에서 손을 떼버리게 할 수도 있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이런 판단을 내린데에는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일본이 서구국가에 대해 개전을 결심하면서 [[러일전쟁]]의 기억을 떠올렸는데, 러시아 제국은 일본근해에서의 국지전을 펼치고 [[쓰시마 해전]]의 패전을 겪자 깔끔하게 전쟁을 포기하고 정전협정을 맺었다.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전쟁은 이런식으로 상비군 병력간의 교전결과에 따라 추가적인 확전을 포기하고 정전협정을 맺는 식으로 진행될때가 자주 있었다. 본국의 본토에 대한 전쟁과 식민지나 변방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분명히 구분하는 문화가 있고, 이를 통해 호전적으로 국지적 교전을 거는 [[포함외교]]를 거는 만큼 이게 뜻대로 풀리지 않고 불리하게 돌아가면 패배를 인정하고 정전을 금방 맺어버리곤 했다. [[비시프랑스]]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역시 자국의 식민지령에 대한 일본의 남방진출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지만 곧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러니 일본은 미국도 태평양 함대만 박살내면 필리핀 지역과 동남아시아를 포기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은 러시아제국이나 프랑스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진주만은 원주민의 섬나라니 미국의 본토가 아니니 큰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한 것인데 러시아나 프랑스 기준이라면 맞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러시아와 프랑스 조차도 일본이 공격했을때의 나라 정국이 개판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 제정 러시아는 러일 전쟁 중인데도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일으켰으며 프랑스는 아예 본토가 점령당한 상태였다. 다르게 말하면 프랑스는 본토가 점령당하지 않았다면 작정하고 일본과도 싸운다면 싸우고 잘하면 이길수도 있었고 인도차이나라는 육지 반도만 아시아의 유일한 자국 식민지였으므로 섬나라들이 식민지라서 상당한 수의 해군을 출동시켜야하는 영국과 네덜란드와 달리 프랑스는 육군이라도 상륙시켜서 잘 싸우면 해군이 일본에게 좀 밀려도 승산을 발휘하기도 좋았다.] 그러나 미국은 식민지를 다수 거느린 식민제국의 전통이 없었고, 식민지 전쟁과 본토 방어전을 명확히 구분하는 문화가 없었다. 더군다나 구세계에서 핍박받던 이민자들이 신세계로 도주해서 세운 국가이며, 열강에 의해 지배받다 독립한 국가라서 타국에 대한 개입적인 정책의 지지율은 결코 높지않았지만 자국이 먼저 공격받았을 경우 방어전쟁에 대해서는 거의 국가이념적 측면에서 히스테리적일 정도로 과잉반응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 [[치머만 전보 사건|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왜 참전했었는가?]] 따라서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식민지에 대한 공격이 아닌, 자국의 본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고 당연히 대규모 징집을 통한 전면적인 전쟁으로 대응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반전여론은 순식간에 침몰해버렸고, 자진입대 행렬이 전국에서 이어졌다. 전면적인 총력전으로 전쟁이 비화된 이상 국가의 체급차이 때문에 이 시점에서 일본의 패배는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